[특집] 장영주 화백의 그림이야기 '나는 제천이 좋다'(7)
- 일곱 번째 그림이야기 “웃고 넘는 박달재” -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박달재를 넘어 충주 외갓집을 간 적이 있다.
바위절벽을 꼬불꼬불 깎아 낸 잔도 같은 외길을 조마조마 끝도 없이 돌아 넘었다. 당시는 강원도 제천이라고 해도 편지가 도착하던 때로 버스기사 시험에 강원도 운전수라면 두 말없이 합격 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당신도 운전수이셨던 큰 숙부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님께서 충주장터에서 사주신 닭 육계장에서 검은 발톱이 달린 노란 껍질의 닭발이 그대로 올라와 놀랐고 화장실을 가신 어머니께서 한참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아 초조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아마 여섯 살 쯤 되었을 것이다.
국민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작품이다.
그는 1946년 공연을 위해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고 박달재를 넘던 중 길가에서 손잡고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된다.
'남편이 서울로 돈 벌러 떠나는데 헤어지는 게 가슴 아파 운다.'는 사연을 듣게 된 반야월은 밤새워 작사를 한다.
이렇게 '울고 넘는 박달재'는 하룻밤 만에 창작된 신 야담이고 ‘한사코 우는 금봉이’는 이광수 소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요컨대 역사적 사실이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박달재’의 바른 의미가 또렷이 적혀 있다.
'박달'은 '단군 역사'에 나오는 신령한 나무로 '환웅께서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학자들은 '박달'을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으로 해석한다.
<정감록>에는 '제천과 충주에 있는 천등 산, 인등 산, 지등 산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쓰여 있고 실제로 박달재에서 시랑산 정상을 향해 가다보면 단군 비석이 있다.
그러니 둘도 없는 보물 산임이 틀림없다.
<고려사>에는 김취려 장군이 1217년 박달재에서 5천의 거란 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고 정상에는 김취려 장군의 기마동상이 당당하게 서있다.
조선 말기, 제천에서 봉기한 독립군들이 충주, 풍기, 봉화, 문경, 안동을 오가며 수없는 땀과 피로 얼룩진 눈물을 흘렸을 박달재이다.
대처로 시집가는 딸의 가마를 보며 눈물짓던 친정어머니의 눈물이 마를 새 없던 백성의 눈물, 박달재이다.
뿐만 아니라 박달재에는 패퇴한 거란군, 뭉골군, 일본군들의 눈물도 섞여 있으리라.
지금은 터널이 뚫려 그 사연 깊은 박달재를 넘을 수 없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모두 땅속으로 쌩쌩 내달린다.
금봉이도, 김취려 장군도, 어머님의 치마폭도, 백운의 칼국수도 모두 시대의 변화라는 바람에 무성영화처럼 흘러 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제천은 마침 영화의 계절이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최초의 음악영화제이다.
당시 엄태영 제천 시장과 실무자가 이루어 낸 국제적인 쾌거로 그 실무자가 현재의 이상천 제천시장이다.
청풍호반과 의림지, 특히 나의 모교인 옛 동명초교 특설무대, 문화의 거리, 메가박스 제천 등 여러 곳에서 기쁘고 의미 깊은 축제를 펼친다.
이미 천지인 철학과 굽이굽이 고되고 기쁜 역사가 현실이 되어버린 박달재 고개 마루이다.
이제는 울지만 말고 웃으면서 당당하게 넘어 보자.
◇ 원암 장영주(元岩 蔣永柱) 화백의 주요약력 및 경력
- 1947년 충북 청주 출생
- 제천동명초등학교(47회)·청주중·청주고·청주교육대학(제5회) 졸업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 화가·선도명상가·국학원 상임고문(현)
- 개인전 13회
-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수학(2017년)
- 카자흐스탄·몽골·미국·일본·프랑스 등 국제전 출품
- 대한민국 미술협회이사 역임
- 한국 크로키회 설립(1985년)
- 목우회 공모전 대상 수상
- 저서 '명상으로 몸 그리기’ 출간
[이 글은 당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